2001년 9월11일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은 이제 끝나가는구나 하는 그런 상징성이 뇌리에 스쳤다. 금세기 패권을 쥔 미국이 무참히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역사적 충격을 받았다.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10년이 될 쯤 이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은 파키스탄 서북부 도시 아보타바드의 부유한 주거지역 은신처에서 미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싸늘히 죽어 북아라비아 해에 수장됐다. 그 죽음에 의문이 든다는 지적이 일고 있지만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 미 정부 고위 관리들의 말을 분석해보면 굳이 불신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DNA 검사 결과 99.9% 빈 라덴의 시신임을 확신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드는 상황이라면 백악관은 수장 전에 죽은 빈 라덴의 사진을 찍었으며 이를 공개할지 여부를 두고 결정하지 않은 상태라고 논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시신 사진을 공개를 했을 경우 정보기관의 활동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테러 세력의 공격 후폭풍이 우려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어 결국 죽은 빈 라덴의 사진을 보여줄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여하간 테러로 미 제국을 무너뜨리려던 빈 라덴의 계획은 자신의 죽음으로 일단락됐다. 알카에다는 물론 빈 라덴의 죽음에 대한 보복에 나설 것을 다짐하고 있지만 우두머리가 없는 상태에서 당장 어쩌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국제정치적으로 전무후무한 듯한 테러를 당해 쓰러지려던 미국이, 최악 금융위기로 붕괴되려던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미국과 서방은 아직 건재할 뿐더러 오히려 더 서구적 가치를 들이대며 역사를 지속적으로 지배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 분 민주화 혁명은 장기 통치에 억눌린 민심이 폭발한 것이지만 ‘국가 시스템의 합리화’란 서방의 문화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불길이 일고 있는 리비아 반군을 지원하는 나토(NATO)의 힘은 막강하며 이를 견제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가끔 이들 국가의 견제 목소리는 왠지 모를 ‘투정’에 비견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철천지 원수 빈 라덴의 사망 소식에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서 미국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꽤 다른 즐거움을 만끽했었다. 영국 왕실의 결혼, 세기의 결혼이라며 메이저 언론들이 앞 다퉈 보도했던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의 웨딩마치였다. 20억 명이 지켜보고 시청했다고 하니 이런 결혼이 또 있을까, 동화보다 더 한 얘기였다.
왜 그런 결혼이 관심일까 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서방 언론의 힘이랄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의 세계 유수 언론들은 결혼 한 달 전후부터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전투기가 리비아 트리폴리를 폭격하는 당시에도 그랬다. 누구는 신데렐라로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누구는 정부 진압군에 의해 겁탈당하는 뉴스가 겹쳤다.
영국 왕실의 결혼이 세계에 라이브로 방송되는 모습을 보고, 정말이지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의 움직임이 브레이킹 뉴스가 되는 것을 보고 세계는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초등생적 사고를 했다. 절대 무시 못 하는 서방의 힘이었다. 빅 브라더 같은 세계 언론의 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치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서방이 문화적으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엉뚱하게도 중국이 대국으로 굴기를 하는 것을 꼭 견제만 할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서방의 가치를 무조건 우리가 따르지 않아야 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 부국강병을 모색하고 있지만 빛바랜 듯하고 중국의 초강국 융성은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음이 자주 증명된다. 중국 지도부가 국영 신화통신의 보도 기능을 강화하는 것뿐 아니라 24시간 영어방송을 송출하는 것도 이런 움직임과 절대 무관치 않다. 미디어 힘은 거의 모든 것이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을 잡았을 당시 서방 언론은 흥분했다. 갓힘(Got Him)으로 표현하며 독재자를 잡았다고 했다. 이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 후 이라크 침공 명분인 대량살상무기가 이라크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보인 서방 언론의 상대적 무심함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빈 라덴의 죽음은 어쩌면 역사적 한 흐름을 다시금 엿보게 한다. 10년 전 하늘을 뒤덮는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가라앉을 것만 같던 미국이 이제 그 주범을 잡아 자축하는 모습에선 당장 미국 주도의, 서방 주도의 모습이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란 이론은 맥을 못 춘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빈 라덴 사망 관련 코멘트에서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헛말이 아니며 확신에 찬 표명이다. 이미 우리는 영국 왕실의 한마디, 한 제스처에 경탄하는 그런 세계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런 흐름, 서방 주도의 흐름은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더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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